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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제안

아베총리 무역보복 정책을 취소할 수 있는 전략

작성자 김성식    211.42.***.92
등록일 19.07.12 조회수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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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에  읽은 책,  내용이 기억나서  찾아보았습니다. 

 

2권에  답이있고,  중국도  참여하여  일본을 압박케 할 수 있는 내용 

 

1권 제목 : 일본인도 모르는 천황의 얼굴

2권 제목 : 야마시타골드

 

...........책표지그림등  파일첨부가 안되어 복사해서 붙입니다.  ...............

 

일본과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은 2권의 책에 답이 있다
10년전,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기억이 나서 참고,     김성식 atomygss@naver.com


아베 총리  외조부   기시 노부스께

 

2.2. 전후 전범기소에서 총리 취임까지

 

전쟁이 끝난후 고향 야마구치현에 은둔해 있다가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도조가 목이 달아난것과는 달리 경제통이었던 기시나 코다마 요시오를 써먹으려는 GHQ의 의도에 따라 도조가 처형된 다음날에 불기소 처분을 받고 공직추방조치만을 받게 된다.[7]

이후 한동안 동양 펄프라는 회사에서 회장으로 재임하다가 1952년 공직추방조치가 풀리면서 정계로 복귀해 자주헌법 제정, 자주군비 확립, 자주외교 전개를 슬로건으로 일본재건연합을 결성하고 1953년 중의원 선거에 임했지만 일본재건연합이 선거에서 대패하자 일본 사회당에 입당하려고 했지만 너 같은 보수는 즐이염로 거부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해 자유당 후보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4년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기시의 의사에 반하는 경무장,대미협조 정책으로 나가자 이에 반발하다 자유당에서 출당되었다.

이후 11월에 하토야마 이치로(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할아버지)와 함께 일본 민주당을 조직했다가 좌우분열이 극심했던 일본 사회당이 재통합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자유당과 보수대연합을 주창해 자유당과 합당하여 자민당(자유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55년 체제)

이후 1956년에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 입후보 했지만 이시바시 단잔에게 7표차로 패배해 이시바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맡았다가 2개월후 이시바시가 뇌연화증으로 총리직 수행이 불가능해지자 내각이 총사퇴했다. 이때 기시는 스가모 형무소에 투옥중이었던 일본 우익의 행동대장인 고다마 요시오의 자금및 인맥 지원을 받아 이시바시로 하여금 총리직을 계승하게 한다는 지명을 받아내는데 성공해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2.3. 총리 재임 시절

 

총리 취임 기자회견에서 부정부패,가난,폭력의 삼악을 척결하고 싶다고 밝혀 삼악척결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또한 이시바시 총리의 공약이었던 1천억엔 감세도 시행했다.

1958년 의회 해산뒤 열린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287석의 절대안정 과반의석을 확보해 사실상 자민당의 초장기 집권의 서막을 알렸다.

그러나 미일 안보조약 개정 과정에서 주일미군 재판권 포기 밀약사건이 터지면서 자주외교를 부르짖던 기시의 노선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미국이 공식적으로 재판권 포기를 천명하라고 요구했지만 기시는 국내여론 악화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한 미일 안보신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국회에 비준동의를 받으려 상정했지만 야당인 사회당이 강력반발해 안보투쟁을 부르게 되었다. 안보폐기를 부르짖던 사회당이 미일 안보신조약 처리를 막으려 하자 1960년 5월 29일, 국회본회의장에 사회당 의원들의 출입을 통제한채로 미일 안보신조약을 통과시켰다.

이로인해 반정부 투쟁이 극에 달하자 기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경호한다는 명분으로 극우 행동대는 물론 야쿠자들까지 모조리 동원해서 반정부 투쟁을 제압하려 했다.이거 어떤 드라마가 생각나는데? 그러나 이런 기시의 정책은 병크를 터트려 1960년 6월 15일, 야쿠자가 시위대를 공격해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사태가 일어났는가 하면 국회에서도 폭력사태가 발생해 국회에서는 국회로 진입하려는 학생 시위대와 이를 막는 경찰들의 충돌 과정에서 도쿄대 여대생 간바 미치코가 압사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기시는 "국회 주변은 시끄럽지만, 긴자나 고라쿠엔 구장은 언제나 그대로이다. 나에게는 소리없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발언으로 물타기를 시도했다.[8] 그러나 전임 총리 세명(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가타야마 데츠, 이시바시 단잔)이 기시에게 그대가 책임지고 사퇴하는게 좋겠소라고 하는 사퇴권고까지 나오고 말았다.

기시는 최후 수단으로 자위대의 치안출동[9]을 명령했지만 방위청 장관 아카기 무네노리[10]가 이를 거부했고 시위대는 수상관저를 포위해 기시와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가 죽음 직전의 위기로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이 된 미일 안보 신조약은 자동으로 성립되었고 국회 비준뒤에 히로히토 덴노가 공인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이후 기시는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7월 15일 내각이 총 사퇴했다.

 

2.4. 총리 퇴임 이후

 

총리 퇴진 이후에도 만주 인맥을 활용해 만주군 경력이 있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교분을 쌓았고 이후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도 기시가 중요한 역할을 한것으로 알려졌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서 기시 노부스케는 대한민국정부로부터 수교훈장 중에서 1등급인 광화대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끝발 아래로 취급 받았던 고다마 요시오가 2등급인 광화장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주요 국가에서 다소 격이 떨어지는 관리를 사절로 보내거나 아에 경축 사절을 보내지 않았지만, 기시 노부시게는 일본 사절단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國葬) 때에도 참석하였다. 당시 한국의 주류 언론들은 기시 노부스케를 친한파로 다뤘다.

 

? 1. 아베총리는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역사를 모르는 듯.  고마다 요시오를 알았으면 위안부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베총리가 2차 대전 중 천황 직속 골든 릴리(백합작전) 부대 존재를 모르는 듯

 

? 2. 중국이 베이징 원인의 유골이 천황의 박물관에 있을 것이다 라는 사실을 알면 문화 외교적으로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  양동작전이 필요 p107~p108(2권 야마시타골드)

 

? 3. 깊게 들어가면 미국이 관여,....... 아베만 공격하는 것이 필요, 압박하여 모든 것 취소

 

? 4. 위안부 문제는 한국만 있는 것이 아닌데, 한국만 마무리를 못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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