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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임시정부 - 한국군에 대한 정신적 및 실체적 정통성 논증

저자 이용민 (민주연구원 연구위원)
등록일 19.04.10 조회수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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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임시정부- 한국군에 대한 정신적 및 실체적 정통성 논증

배경

 본고의 작성목적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2019.4.11) 관련,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광복군이라는 사실을 되짚고 광복군을 창설한 임시정부의 군사적 사상·조직을 살펴봄으로써 임시정부가 우리 국군의 뿌리임을 논증하기 위함이다. 이에 우선 광복군이 3가지 측면(임시정부의 정통성, 건군주체, 국군정신)에서 국군의 연원(淵源)으로서 이미 명확하게 정립됐음을 밝혔다. 

 임시정부에 대한 한국군 정통성 논증은 크게 정신적 및 실체적 정통성 차원에서 전개했다. 

 첫째, 정신적 정통성에 대해 군사조직체를 지향한 김구의 국방관(觀) 및 임시정부의 군사방향성을 검토했다.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지낸 백범(白帆) 김구 주석은 임시정부下 국가의 토대를 생존시키기 위한 실제적 군사사상으로서 무력투쟁노선에 방점을 두었고, 이는 ‘한인애국단’ 창단부터 광복군 창설에 이르기까지 군사적 조직체로서 표출됐다. 또한 임시정부는 통합정부 수립(1919.9.11) 전후로 군사정책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했고, 국민개병제에 의한 군 건설을 분명한 목표로 설정하고 근대적 징병제 실현을 통한 ‘국민軍’ 창설에 중점을 뒀다. 이로써 임시정부가 군사적 사상 및 방향성 차원에서 우리 국군의 뿌리임을 판단할 수 있었다. 

 둘째, 실체적 정통성에 대해 수립 직후부터 軍편제, 법제, 병력관리를 총괄한 임시정부의 군제(軍制)를 검토했다. 임시정부는 1919년 수립 즉시 ‘군사광복정책’을 필두로 실질적 군사제도를 마련했고, 이는 군대 편성 및 법령·조직규칙 제정부터 병력의 모집·양성·훈련·통할까지 대규모로 추진됐다. 동년 4.25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장정」을 통한 군무부 설치, 「대한민국임시관제(11.5)」를 통한 ‘대본영(大本營)’ 설치, 12.18일 군무총장 노백린이 발표한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대한민국육군임시군구제」 및 「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가 대표적 사례다. 광복군은 이러한 임시정부 군제의 결정체로서, 총사령부를 주석 직할로 편제해 주석의 통수권을 명확히 했고 통수부를 통해 일관된 군사지휘체계를 확립해 광복군이 임시정부 국군임을 명문화했다. 이로써 임시정부가 ‘실체의 실재(實在)’ 차원에서 우리 국군의 뿌리임도 확인했다. 

 임시정부를 국군의 근간으로서 인식함은 국군의 맥(脈)과 계보, 그 정통성을 확증하는 일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헌법정신을 드높이므로 凡국가적으로 고려돼야 할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의견이며, 민주연구원의 공식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1. 들어가며 :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 


 한국광복군(이하 광복군)은 (1)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한국군 창설과정에서의 (2) 건군주체 및 (3)국군정신 차원에서 우리 국군의 연원(淵源)으로 이미 명확하게 정립 

 

  (임시정부) 제헌헌법 및 현행헌법, 現 정부가 임시정부와 동일한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 등 대표적 근거들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계승했음은 입증된 사실 1) 

  - 제헌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1919년 3.1운동을 건립됐고 임시정부를 계승 및 재건했음을 표명, 현행헌법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음을 천명

 

 

- 임시정부는 수립(1919.4.11) 직후부터 ‘대한민국’을 연호로 사용, 1948.7.24일 취임한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각종 정부문서에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으로 명기 2) 

   ⦁ 임시정부 당시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 1945년은 ‘대한민국 27년’으로 표기 

   ⦁ 정부수립(1948.8.15) 후 9.1일부터 「관보」 발행, 그 출간일자를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표기 

   ⦁ 국가가 바뀌거나 동일국가에서도 황제가 바뀌면 새로운 연호를 사용(고종의 ‘광무(光武)’ → 순종의 ‘융희(隆熙)’)하는 연호의 예(禮)로 볼 때 現 정부는 새로 새워진 것이 아닌 임시정부에서 이어진 것 

  -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계승했으므로 국군은 임시정부의 정규군인 광복군을 계승한 것 

 

 (건군주체) 대한민국 국군은 광복군 출신들 중심으로 창설, 건군작업을 주도하던 미군정도군의 정신적 기반을 광복군에 두기 위해 해당 출신들을 국군의 ‘상징’으로서 전면에 배치 

  - 1945년 해방 후 일본군 출신들이 군대 창설을 우선적으로 준비했으나, 이들이 스스로 건군주체로 인식하거나 일본군의 틀을 건군의 정신적 근거로 삼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 핵심 

   ⦁ 당시 군사경력자는 광복군 및 일본군 출신으로 구분, 1945.8~9월 결성된 이응준의 ‘조선임시군사위원회’, 이혁기의 ‘조선국군준비대’, 왕익권의 ‘조선학병동맹’ 등이 일본군 출신의 군 창설 준비 例 

   ⦁ 이응준 위원장(日육사 졸업, 일본군 대좌로 활동)은 일본군 출신들의 인식을 대변하는 인물, “어제까지도 나는 일본군 고급장교였다. 그러한 사람으로 조국이 해방됐다 해서 세상 표면에 나서 날뛴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3)이라며 일본군 출신들이 건군의 주체로 나설 수 없음을 천명

 

 

 

1) 대한민국 정부와 임시정부 간 역사적 관계를 밝힘으로써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규명한 연구는 다수 있으며, 

본고는 해당 연구들이 제시한 다양한 근거 중 대표적인 2가지 논거(헌법, 연호)에 방점을 두고 기술 

2) 한시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어디서 찾아야 하나”, 『한국근현대사연구』 84, 2018.3, p.368. 

3) 이응준, 『回顧九十年 1890-1981』, 산운기념사업회, 1982, p.229.



 ⦁ 이응준과 같이 일본군 대좌 출신이었던 김석원과 신태영도 일본군에 복무했던 한인장병들 다수가 군부대 편성을 종용했으나, “임시정부가 입국하고 광북군사령관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조용히 근신 할 수 밖에 없다”4)라며 일본군 출신들이 임시정부 및 광복군에 앞설 수 없음을 명확히 표명 

  - 미군정 당국자들도 건군과정에서 일본군 출신들에 자문만 획득하고 광복군 출신을 내세우며 통위부장에 유동열(임시정부 참모총장), 조선경비대 사령관에 송호성(광복군 제5지대장) 임명 

 ⦁ 통위부(前 국방사령부)는 국방부, 조선경비대 5) 는 군대 조직으로서 초대 통위부장에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이 거론됐으나 당시 그의 임시정부 특수임무 6) 로 임명이 제한되자 유동열 7) 이 대안자로 부각 

 ⦁ 유동열을 통위부장에 추천, 취임(1946.9.2)하도록 종용한 인물이 이응준인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


(이응준이 유동열에게 8)) “어르신네께서 앞으로 우리나라의 干城(간성)이 될 군대의 象徵(상징)이 되어 주셔야만 軍의 자세가 바로 설 것이라는 소견입니다. 임시정부 요인 여러분들께서 말씀하시는 法統(법통)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계승케 하기 위해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주시는 것이 하나의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해 주셔야겠습니다. 어르신네께서는 임시정부의 참모총장이시며 앞으로 이 나라에 세워질 군대의 精神(정신)이 되셔야 할 사명을 아울러 지니신 것입니다.” 

 

(강영훈(군사영어 1기, 통역)이 이응준의 추천에 대해 9)) “현재 조선경비대 장교는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출신 등으로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軍 특히 간부의 화목과 단결을 이룰 수 있는 분이어야 하고, 군간부들뿐만 아니라 국민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 이 두가지 조건에 합당한 분은 임시정부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 장군 밖에 없다는 소신을 피력하셨다.”


 (국군정신) 이범석 초대 국방부장관은 국군 창설 시 건군방향에 대해 “군의 정신은 광복군의 독립투쟁 정신을 계승한다”10)고 천명, 광복군의 이념적 토대를 역사적 소명으로서 수용·발전 

  - 미군정은 1948.8.24일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협정」 체결로 한국정부로 군권 이양, 이는 광복군(통위부장, 조선경비대장)에서 광복군(국방부장관)으로 군사권이 넘겨진 것으로서 의미 

  - 이범석 장관의 천명은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1940.9)」와 동일한 흐름, 이같은 건군정신은 「국방부훈령」, ‘국군3대선서’, ‘국군맹서’ 및 「군인복무령」을 통해 구체화 

  - 이는 또한 이청천 총사령이 1946.5.16일 ‘한국광복군 복원선언’을 통해 “광복군이 독립군의 통합단일군으로서 새로운 국가의 건군에 종사할 것”11)을 분명히 밝힌 것과 일맥상통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 中 12)) “(광복군은) 대한민국의 건국군으로 약소민족의 전위대(前衛 

隊)이며, 중한 공동의 적을 물리치는 선봉군이자 동아(東亞)평화의 기간대(基幹隊)” 

 

(‘한국광복군 복원선언’ 中) “본 군의 전신은 국내의 국방군이다.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한국독립군, 고려혁명군, 중한연군, 중한연합토일군 등이 또한 그 전신이다. 본 군은 귀국의 승인을 받았으며 새로운 군대를 조직할 수 있도록 ... 한국이 광복되었기 때문에 본 군은 중국에서의 작전임무는 이미 끝났다. 이에 복원을 선포함과 동시에, 앞으로 귀국하여 건설에 종사할 것을 선포하는 바이다.”


 

 

4) 고정훈, 『祕錄 軍(上)』, 동방서원, 1967, pp.184~185. 

5) 통위부와 함께 미군정의 건군작업을 위한 핵심조직, 전국 8개도에 1개 연대씩 편성됐던 군대 

6) 중국內 교포들의 생명·재산 보호 및 귀국 지원, 일본군에 징병됐던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확군활동 

7) 육군예비학교 ‘세이조학교(成城學校)’를 거쳐 1903년 日육사 졸업 후 대한제국군 장교로 근무하다 연해주와 

만주지역 독립군으로 활동, 임시정부 광복군에서 최고통수권을 가진 통수부의 막료(참모총장)로 선임 

8) 위의 책, pp.194~195. 

9) 강영훈, 『鐵騎 李範奭評傳』, 삼육출판사, 1992, p.101. 

10) 장철, “광복군과 우리 국군의 정통성”, 『국방소식』 141, 2002.8, pp.18~19. 

11) 『申報』, 1946.5.17.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0(중국보도기사 Ⅱ),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011. 

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임정편 Ⅱ), 1971.12.20.



2. 한국군 정통성 논증 :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1) 정신적 정통성 


 백범(白凡) 김구는 임시정부下 국가의 토대를 생존시키기 위한 실제적 군사사상으로서 무력투쟁노선에 방점, 이는 ‘한인애국단’부터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군사적 조직체 지향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지낸 김구의 국방관(觀)은 자주독립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한 민족 단일체를 구성하고 항일무력투쟁 의지를 응집시킨 군사집단을 조직함으로써 물리적 표출 

  - 동학운동 및 의병 투신 과정에서 ‘분산되지 않는 국민의 힘’이 국가존립에 절실함을 깨닫고 ‘한인애국단’ 창단(1930), ‘한인특별반’ 설치(1933) 및 ‘한인특무독립군’ 조직(1934) 주도 13) 

   ⦁ ‘한인애국단’을 통해 임시정부의 의열투쟁을 실질적 지휘, “임시정부에서 운동계가 침적(沈寂)한즉 군사공작을 못한다면 테러공작이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14)고 강조하며 불가피한 투쟁임을 토로 

   ⦁ 중국 장개석 총통과의 담판을 통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 설치, 애초 요청 했던 기병학교 설립 건 15) 은 수용되지 않았으나 장개석이 자국의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과정을 허락하는 단초가 됐고 이후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청천 및 김원봉 휘하 한인청년들이 낙양분교에 합류 

   ⦁ 군사교육을 받은 요원들을 중심으로 남경에서 ‘한인특무대독립군’을 조직하고 1935.2월부터 별도의 학생훈련소를 운영해 군관학교에 입교할 한인청년 모집 및 예비교육 실시, 광복군의 근간 마련 16)



 - 1935년 김구는 중국정부에 임시정부 공군 건립 요청, 국가 기간(基幹)으로서 군을 육성하고 현대적 군종(種)까지 아우른 그의 진보적 군사관 및 군사적 안목이 부각되는 부분 

   ⦁ 중국 천궈푸(陳果夫)가 원칙적으로 찬성했으나, 비행훈련 및 경비마련 법령 제정을 촉구해 미실현 18)


 

 

13) 백기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국방·군사관”, 『군사논단』 69, 2012, pp.211~212, 216~218. 

14)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직해 백범일지』(白凡金九全集 1), 대한매일신보사, 1999, p.512. 

15) 『김구 주석의 기병학교 설립 건의에 관한 건』(白凡金九全集 4), 대한매일신보사, 1999, p.799. 

16) 『대한민국 임시정부 1』(김희곤, 白凡金九全集 4), 대한매일신보사, 1999, p.17. 

17)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94, pp.311~312. 

18) 『김구 주석의 공군 건립 요청』(白凡金九全集 4), 대한매일신보사, 1999, p.992.



⦁ 김구가 직접 비행기 구입 및 공군 창설을 건의한 것에 의의, 이후 그의 아들 김신이 中비행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비행훈련을 받고 해방 후 공군 창설에 중요한 역할 담당 19)( 공군참모총장 역임) 

  - 김구의 군사적 사상·활동은 ‘접주(接主)’로서 동학운동에 참여, 작전을 이끈 경험에서 비롯 20) 

⦁ 당시 ‘김창수’라는 개명으로 활동한 그는 주로 산포수로 구성된 동학군 편성, 장교 경력자를 활용해 총술·행군·체조 등을 교련하고 정덕현과 우종서의 지원으로 군사활동에 대한 전략·전술체계 정립 21)


(김구가 동학군 편성에 대해) “경군(京軍)과 왜병이 와서 접전이 될 터이니 연비(聯臂) 중에 무기가 있는 이는 수집하여 군대를 편제하기로 하였다. ... 산포수(山砲手)인 상놈 연비가 가장 많으나 인근 부호에게서 약간의 호신기(護身器)를 수집한 외에 대부분이 산영 포수 제자가 자기 총기를 가져온 것으로 군대로 편성한즉 총 가진 군인이 700여 명이라. 무적(武的) 방면으로 보면 거사 초에 있어서 누구의 접보다 우승지위(優勝地位)에 재(在)하였다.” 

 

(동학군 전략·전술체계의 5대 군령) “➀군기정숙. 병졸이 서로 대할 때 절하거나 높임말을 쓰는 등을 폐지할 일. ➁득민심. 동학당이 총을 가지고 촌려에 횡행하며 소위 곡식이니 금전이니 강도적 행위를 금지할 일. ➂초현문(招賢文)을 발포하여 경륜지사(經綸之士)를 다득(多得)할 사(事). ➃ 전군을 구월산 중에 집중하고 간련(諫練)을 시(施)할 일. ➄양도(粮道)는 재령 신천 양군에 왜(倭)가 무미적치(貿米積寘)한 것이 수천 석이니 그것을 몰수하여 패엽사(貝葉寺)에 이적(移積)할 일.”


  임시정부는 주석제 전환 후 통수부 구성 및 정식 군사체계 구축을 통해 의열투쟁의 제한된 수준을 넘어선 광복군 창설, 이는 정규군으로서 김구를 중심으로 한 군사조직의 결정체 

  - 통수부는 근대적 군사지휘체계를 목표로 주석 예하 참모부(유동열), 군무부(조성환), 내무부 (조완구)로 구성, 김구가 주도한 임시정부 무력투쟁노선의 성과로서 중국군 직제 참고 



 임시정부는 통합정부 수립 전후로 군사정책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 국민개병제에 의한 군 건설을 분명한 목표로 설정하고 근대적 징병제 실현을 통한 ‘국민軍’ 창설에 중점 

 

 1919.4.11일 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곧바로 군사제도에 대한 구상이 시작됐음에 주목 

  - 국가기구로서의 정규 군사조직에 대한 당위적 필요성 인식, 당일(4.11) 통과된 「임시헌장」 제6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급(及) 병역의 의무가 유(有)함”이라 규정 

   ⦁ 군사 기본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국민의 병역의무 설정, 국민개병(皆兵)제 지향을 표방한 것 

  - 동년 9.11일 6개 임시정부(상해·한성·연해주 등)가 통합정부 수립 22), 1주 후 9.17일 발표된 「시정방침」에서도 지속적인 독립전쟁 준비를 천명하며 군사정책의 구체적 지향점 제시 

   ⦁ 군사경력자 소집, 의용병 조직, 비밀 군사조직 건설 및 통할, 사관학교 설립, 비행부대 편성, 무기 제조·사용법 학습, 전시 기술자 양성, 군수물자 조달 교섭, 군사선전원 파견, 군법·규율 제정 등 23) 

 1920.1월 안창호 내무총장은 독립의 절대수단으로서 ‘군사’에 방점, 군무부로 군사행정 총괄 

  - 6개 독립방략(군사·외교·교육·재정·사법·통일) 제시, 노백린 군무총장下 육·해군 편성 구상


 

 

19) 공군본부, 『6.25전쟁 증언록』(김신의 증언, 2000.10.11.), 2002, pp.36~39. 

20) 백기인, 앞의 글, pp.213~215. 

21)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앞의 책(직해 백범일지), pp.341~343. 

22) 정용대, 『대한민국임시정부외교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pp.30~58. 

23)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해시기 Ⅰ』,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p.119.



(2) 실체적 정통성 


 임시정부는 1919년 수립 즉시 ‘군사광복정책’을 필두로 실질적 군제(軍制) 마련, 군대 편제 및 법령·조직규칙 제정부터 병력의 모집·양성·훈련·통할까지 대규모로 추진 

 

 1919.4.25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장정」은 정부부처內 군무부를 설치, “군무총장이 육· 해군 군정(軍政)을 장리(掌理)하고 군속을 통할하며 소관 급 공서(公署)를 감독”24)할 것 규정 

  - 동년 7.8일 안창호는 시정연설을 통해 “군사활동에 대한 노력을 경주할 것”25)이라 강조 

  - 9.11일 「임시헌법」 개정·공포 후 통합 임시정부(총리제→대통령제, 행정6부→7부1국)에서도 군사부문의 경우 군무부가 ‘대통령 직권’으로 육·해군을 통솔하도록 설정 26) 

 

 동년 11.3일 노령·만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이끌고 있던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취임한 직후 군사정책 강화, 11.5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관제(법률 제2호)」로써 ‘대본영(大本營)’ 설치 27) 

  - ‘대본영’은 대통령을 원수로 한 군사 최고기관, 국무총리 및 참모총장이 작전계획 작성·실행 

  - 대통령 직할기관으로서 국방 일체를 관장하는 참모부 및 자순(諮詢)기관인 군사참의회 편성 

   ⦁ 참모부는 총장·차장 및 참모 약간명으로 조직, 대통령은 군사참의회로부터 중요 군사자문 획득 

  - 국무원 소관 군무부內 6개국(비서, 군사, 군수, 군법, 육군, 해군) 설치, 군사행정 전반 지원 

  - 군령기구로서의 ‘대본영’ 및 참모부, 이를 지원하는 군정기구인 군무부를 이원화하는 편제 28) 

   ⦁ 現 국방부 역할의 군무부는 전투력의 토대인 군대 편성 및 군인 양성을 제1의 급선무로서 인식 29) 

 

 군무총장 노백린은 동년 12.18일자로 군무부령 제1호 「임시군사주비단제」를 비롯 법적근거 로서 군제 법령 및 조례 발표, 이는 임시정부가 군사정책을 본격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




 

 

24)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법령집』, 국가보훈처, 1999, pp.88~89. 

25)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임정편 Ⅱ), p.400. 

26) 조성환 외, 『대한민국 국방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7.9.11, pp.27~28. 

27) 홍선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군 건설 계획과 추진”, 『군사』 97, 2015.12, p.179. 

28) 백기인, 앞의 글, pp.207~208. 

29) 『군무부포고 제1호』(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제12호), 1920.2.12. 

30) 조성환 외, 위의 책, pp.28~30. ; 홍선표, 위의 글, pp.179~182. ;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임정편 Ⅱ), pp.12 ~19, 35~40, 52~60. ; 김희곤, 『상해지역 한국독립운동단체 연구』,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p.158. ;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광복군 : 국군의 날 제정 검토”, 『역사와실학』 15·16, 2000.1, pp.489~490. ; 군사학연구회, 『군사사상론』, 플래닛미디어, 2016.7.5, pp.574~577. 등 종합


 


 동년 12.15일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확정한 임시정부는 당해 「군무부 포고」 제1호 (1.24) 공포, “너도 나와 대한민국 군인이 되어 이천만 남녀는 1인까지 조직적, 통일적으로 광복군 되기를 서심(誓心) 단행할지어다”31)라며 「임시헌장」으로서 지향했던 국민개병제 채택 

  - 군적 등록(18세 이상 남자)을 통해 全국민에 병역의무 부여, 1920.1월 중순부터 시작 

   ⦁ 징병여건이 성숙치 않은 현실 감안, 우선 의용병(義勇兵)으로 군적에 입문하는 방침 수립 

   ⦁ 1차 대상은 상해 한인들로서 지원제로 시행돼 2.7일부터 본격화, 군적은 ‘갑·을’종(種)으로 구분해 매일 군사훈련(갑종 1시간, 을종 2시간)을 받도록 규정했고 각각의 군적 등록수는 40명과 100명 

  - 임시정부는 1920.3.20일 제1회 ‘국민군 편성식’을 거행함으로써 대외에 국민개병 천명 32) 


 1920.3.2일 이동휘 총리는 임시정부의 세부 군사계획이 담긴 「시정방침」 14개항 발표 33) 

  - 윤기섭 등 5인은 임시의정원 회의(2.23~3.30)에 「군사에 관한 제의안」 제출, 원안대로 가결 

  - 5월 「한국독립방책의 건」 채택으로 연결, 대규모·규율적 전쟁을 위해 군무총장에 권한 부여


1. 군사적 경험이 있는 인물 조사·소집, 군사회의 개최 및 작전계획 준비, 각종 군사직무 분담·복무 

2. 러시아·중국 각지에 10만 명 이상의 의용병 지원자 모집, 대오 편성 및 군사훈련, 군 인재 양성 

3. 러시아·중국 각지에 사법부 분치(分置), 응모한 병사 통솔 지휘 및 군사교육 감독 

4. 군사적 기관 조사 및 군무부에 예속 

5. 국내 각지에 의용병 모집 및 대오 편성, 각지 요새에 잠복 

6. 러시아·중국 각지에 사관학교 설립 및 사관 양성 

7. 청년 선발 후 미국 파견, 비행기 제조 및 비행전술·전략 습득 

8. 내외에 모험청년 선발, 작탄대(炸彈隊) 편성 및 기술 습득 

9. 중국·구미 각국에 교섭 및 무관학생 파견 

10. 청년 선발 후 포창술(砲槍術)·화차기관술 등 전시에 긴요한 기술 습득 

11. 미국 등 외국과 교섭 및 군사물자 수입 준비 

12. 국내외 주요지점에 무역상의 명의로 양식 준비 및 전시에 충당 

13. 군사선전대 특설 및 선전방법 강구, 각지에 선전원 파견 및 전투정신 고취 

14. 군법 등 제정을 통해 군대 질서 및 규율 엄격히 설정


 

 

31) 독립신문, “국민개병”, 1920. 

32) 주요한, 『안창호일기』, 1963. ; 독립신문, “국민개병 제일성”, 1920. 

33) 한용원, 『대한민국 국군 100년사 : 1895~1945 그리고 1945~1995』, 오름, 2014.7.5, pp.152~153. ;  

조성환 외, 앞의 책, pp.31~32. ; 이현희, 앞의 글, pp.491~492.



 1940.9.17일 창설된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군사광복정책을 통한 군제(軍制)의 결정체, 한국광복군총사령부內 10개 처(處), 특무부, 헌병대 및 최대 4개의 지대로 편제 

 1940.9월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3당(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통합으로 동년 5.9일 결성된 한국독립당(중앙위원장 김구) 주도로 결속 강화, 광복군 독자적 창설 34) 
  -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협조를 위해 노력, 미온적 태도에 미주 한인들의 재정지원으로 창군 
  -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7.15일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해 대일항전을 전개했던 유동열· 이청천·이복원·현익철·김학규·안공근 등을 중심으로 남경에서 군사위원회 발족 
   ⦁ 전시체제 대처를 위한 군사정책 및 활동계획 수립, 중일전쟁 확대 및 중국군 총퇴각과 맞물려 무산 
  - 이후 (1)병력모집, (2)재정확보, (3)중국정부 교섭 및 지원 획득의 3가지 차원에서 창설 추진 
   ⦁ 1939.3월 사천성 기강에서 세부 군사계획을 마련한 후 동년 10월 군사위원회 위원들을 중심으로 군사특파단 구성, 11월 서안에서 화북지역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초모 전개 및 군사근거지 구축 
   ⦁ 임시정부는 미주지역 ‘대한인국민회’, ‘동지회’, ‘대한여자애국단’ 등에 광복군 창설소식을 전파하고 “우리 힘으로 그 기초를 세워놓고 외인(外人)의 힘을 빌리자”며 재정모금 활동 전개 
   ⦁ 중국內 군대 편성이므로 당국 승인·재정지원이 절대적, 1940년 초부터 임시정부는 광복군 창설이 중국의 항일戰에 유익하다며 원조를 제의했고 이로써 장개석 총통을 비롯한 중국측에 공감대 형성 
  - 1940.5월 임시정부는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 및 ‘총동원방략’을 중국정부에 공식 제출, 한중연합군으로서의 창군 및 연합작전 전개가 主내용으로 장개석의 승인 획득 35)


 

 

34) 조성환 외, 앞의 책, pp.75~77. 

35)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2017.12.28, pp.125~126. ; 한용원, 앞의 책, pp.171~173.

 

 ‘총동원방략’ (總動員方略)

 “적국, 한국, 동북지방, 중국 관내, 미국 등 각지의 교포와 민중을 총동원한다. 특히 동북 4성 교포 3백만의 조직을 새로 정리하고 무장군대(지방예비대)를 조직, 훈련하여 적의 군사시설을 파괴한다. 한편으로는 광복군을 편성, 훈련시켜 중국항일군과 공동으로 싸우게 하고 많은 군사인재들을 양성하여 장래 광복군의 기간에 충당한다.”

 

 - 중국군사위원회는 광복군의 중국군 예속방침 통보, 이에 강력 반발한 임시정부는 미주지역의 지원을 토대로 기존 군사간부들 및 만주 독립군 출신 중심의 총사령부 우선적 구성에 합의 

 - 1940.9.15일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선언문」36) 발표, 9.17일 중경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 성립전례식’ 거행으로써 광복군 창설 

   ⦁ 창군 초기 30명 내외의 총사령부뿐 단위부대인 지대(支隊)는 아직 조직되지 못했던 상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1919)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장제스)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이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을 계속한다. ... 영광스러운 중화민국의 항전이 4개년에 도달한 이때 우리는 큰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 우리들은 한중연합 전선에서 우리 스스로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시아 인민 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 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광복군 조직은 1940.10.9일 공포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조직조례」를 통해 구체화, 중국군 제도를 참조해 총사령부內 비서처·참모처·부관처 등 주요부서 및 직속기관(특무·헌병) 편제 

  - 총사령부는 임시정부 주석(김구)의 직할下 편제, 광복군의 통수권이 주석에게 있음을 명확화 

  - ‘대본영’制 폐지, 동년 11.1일 군사 최고통수권을 규정한 「대한민국임시통수부관제」 제정 37) 

  - 통수부는 주석 중심의 일관된 군사지휘체계 확립, 광복군이 임시정부 국군임을 명문화한 것 

  - 1941.11.28일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공약」 제정·공표, 주의·사상 여하를 막론하고 한국인 全남녀가 군인이 될 의무·권리가 있음을 밝혀 항일戰에 모두가 참여해야 함을 강조한 것 38) 

   ⦁ 이와 함께 「한국광복군 서약문」도 제정, 광복군內 모든 군사는 해당 서약문에 서명

 

(「한국광복군 공약」) “제1조. 무장적 행동으로써 적의 침탈세력을 박멸하려는 한국 남녀는 그 주의· 사상의 여하를 막론하고 한국광복군의 군인된 의무와 권리를 유함. 제2조. 한국광복군의 군인된 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과 한국광복군 지휘정신에 위반되는 주의를 군내외에 선전하고 조직함을 부득함. 제3조. 대한민국 건국강령과 한국광복군 지휘정신에 부합되는 당의(黨義)·당강(黨綱)·당책(黨策)을 가진 당은 군내외에 선전하고 조직함을 득함.” 

 

(「한국광복군 서약문」) “본인은 적성(赤誠)으로써 좌열 직함을 준수하옵고 만일 배제하는 행위가 유하면 군의 엄중한 처분을 감수할 것을 이에 선서하나이다. 一.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체를 희생하겠음. 二.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절실히 추행(推行)하겠음. 三. 임시정부를 적극 옹호하고 법령을 절대 준수하겠음. 四. 광복군 공약과 기율을 엄수하고 상관명령에 절대 복종하겠음. 五. 건국강령과 지도정신에 위배되는 선전이나 정치조직을 군내외에서 행치 않겠음.”

 

 

 

36) 김삼웅, 『3.1 혁명과 임시정부』, 두레, 2019.2.22, pp.175~176. ; 군사편찬연구소, 앞의 책, pp.127~128. 

37) 한시준, 앞의 책, p.308. 

38) 김삼웅, 위의 책, p.177.

 

 

  - 1940.11월 광복군은 총사령부를 일본군 전선 인접 서안으로 이전, 긴급과제로 지대 편성 39) 

   ⦁ 서안은 1년 전부터 군사기지가 구축되고 있던 상황, 초모활동을 하던 군사특파단을 중심으로 단위 부대 조직에 착수해 제1~3지대(각 지대장 이준식, 고운기, 김학규/ 모두 만주 독립군 출신) 신설 

   ⦁ 1941.1.1일 서안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편입, 이들로써 제5지대 편제 

   ⦁ 1942.4월 ‘조선의용대’를 편입(제1지대)하고 총사령부 직제를 개정해 기존 1·2·5지대를 제2지대로 통합·개편(각 지대장 김원봉, 이범석), 이후 초모병력이 강화되며 1945.6월 제3지대 추가 발족

 

 

 

3. 나가며 


 본고는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광복군이라는 입증된 사실을 되짚고, 광복군을 창설한 임시정부의 군사적 사상·조직을 살펴봄으로써 임시정부가 우리 국군의 뿌리임을 논증 

 

  정신적 정통성에 대해, 군사조직체를 지향한 김구의 국방관 및 임시정부의 군사방향성 검토 

  - 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의 군사조직·법제, ‘한인애국단’부터 광복군까지의 군사체계에 방점 

 

  실체적 정통성에 대해, 수립 즉시 軍편제·법령제정·병력관리를 총괄한 임시정부의 군제 검토 

  - 광복군은 군제의 결정체, 주석의 통수권을 명확히 했고 광복군이 임시정부 국군임을 명문화 

 

 임시정부를 국군의 근간으로서 인식하는 일은 그로부터 이어진 국군의 맥(脈)과 계보, 정통성을 확증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헌법정신을 드높일 것 

 

  관련해 학계 및 정치권(박광온, 권칠승 등)을 중심으로 ‘국군의 날’ 재제정 주장도 제기되는 상황, 국민적 공감대를 토대로 한 사회적 합의 및 더욱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검토할 필요

 

 

 

39) 조성환 외, 앞의 책, pp.78~79. 

40) 육군본부, 『국군의 맥』, 1992, p.339. ; 김삼웅, 앞의 책, p.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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